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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 <조인호> 빛으로 비춰내는 세상풍경- 정운학의 미디어 회화

빛으로 비춰내는 세상풍경

- 정운학의 미디어회화




광주 미디어아트에서 정운학은 독자적인 작품세계를 구축해 나가는 작가 가운데 두드러진 예다. 본래 학부에서 회화를 전공했던 그는 독일 유학과정에서 회화를 근간으로 보다 폭넓은 미학적 토대와 표현매체ㆍ형식들을 찾게 되었다. 그리고 2000년대 초 귀국한 뒤 줄곧 광주를 기반으로 창작활동을 펼치며 ‘입체회화’를 추구해 왔다.


2011년 11월 광주시립미술관 상록전시관에서 청년작가 초대전으로 갖게 된 제법 큰 규모의 일곱 번 째 개인전은 정운학의 지난 10여년 작업들을 일별해보는 기회였다. 그가 말하는 ‘입체회화’는 대개 아크릴판을 구기거나 투명수지로 떠내기도 하고 혼합재료를 이용해서 몸체가 빠진 자루모양의 옷이나 인체, 책 등을 만들어 표면에 색을 칠하고 무늬를 그려 넣거나 꼴라쥬로 회화적인 효과를 내는 작업이다. 옷이든, 책이나 신문지 모양이든, 일상의 소재들을 변형된 형태와 칼라로 표현하면서 현대사회 속 개인의 존재와 삶의 의미, 시대적 메시지를 담아내는 것이다. 겉으로 드러난 세상 모습과, 그 외피 속에 내재된 삶과 존재의 실체들을 통찰하며 입체조형으로 이미지화시켜 내는 작업들이다.

정운학이 즐겨 다루었던 ‘구겨진 풍경’ ‘기억’ ‘책’ ‘옷’ ‘자루’ ‘토루소’ 같은 연작 주제들은 조형양식이나 개념 설정에서 여러 유형을 거듭해서 탐색해 온 과정들을 보여준다. 처음에는 평면작업에서 시작했던 것이 ‘회화의 공간성’에 관한 탐구로 이어져 ‘입체회화’를 제작하게 되고, 더 나아가 적극적 의미의 입체조형과 공간에 관한 해석과 설치로 이어져 왔다. 2011년 초대전 때 보여준 <구석> <계단이 있는 공간> <구겨진 풍경-바다> <저울과 하늘들> <기억의 공간> 등등의 작업들이 그가 말하는 입체회화의 실 예들이다. 아크릴이나 플라스틱판으로 주름과 굴곡이 진 형태들을 만들고, 그 위에 거친 붓질의 채색을 올려 각각의 표정과 전하려는 얘기들을 담아내는 방식이다.

특히 ‘옷’과 ‘자루’는 이름만 다를 뿐 서로 상관된 개념의 작업이다. 허물을 벗어놓은 듯한 하나하나 작품에는 그 안에 담겨있지만 현상으로 드러나지 않는 것, 또는 요즘 세상의 개별존재들의 상실감을 상징적 조형작업으로 대변해낸 것들이다. 이들 ‘옷’이나 ‘자루’들은 심하게 굴곡지거나 바람에 너풀거리면서 각각의 개별존재들을 둘러싼 외적 세상이나 세파, 삶의 환경과의 관계를 무언의 조형언어로 보여준다.

그는 “Sack(자루)은 무엇인가를 담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어떤 것은 볼록하고 어떤 것은 울퉁불퉁하며 그 안에 담겨진 내용물에 따라서 외형적인 형태를 만들어낸다… 움직임을 표현한 자루는 그 안에 담겨진 개개인의 인체일 수도 있고, 상징적인 무엇이 담겨져 있음을 보여준다. 옷이 개인의 정체성을 표현하는 수단이라면, 이 작업은 인체를 감싸고 있는 껍질 안에 담겨져 있는 언어이다”라고 말한다.(2009년 작가노트 중)

정운학의 작업은 독일 유학파답게 물리적 실체에 대한 개념적 접근과 더불어 그 안에 담아내는 언어들에 많은 비중을 두고 있다. ‘책’ 연작의 경우, 큼직하고 두터운 몸집이 구겨진 상태로 몇 개씩 허공에 매달려 있거나 바닥에 놓이기도 하고, 사각의 틀 속에 가로 세로로 짜 맞춰져 구조적인 구성을 이루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책의 실체라 할 텍스트들을 LED 조명이 내장된 투명 아크릴상자에 필름상태로 넣어 조형화시키면서 유명ㆍ무명의 책 이름이나 단어들을 중첩시켜낸다. 이 ‘책’ 작업은 크기나 형태는 비슷하면서 각각의 색채나 담고 있는 언어들을 달리하면서 벽면 또는 공간에 반복 배열되는 경우들이 많다. 마치 일정한 유형을 이루는 세상의 군상들이자 그 하나하나의 다름을 나타내는 듯한 ‘집단과 개체’ ‘반복과 차이’의 관계를 생각하게 한다.

또 하나, 정운학의 작업 가운데 주목할 만한 주제연작이 ‘날으는 신발 Flying Shoes’이다. 2010년 광주신세계갤러리가 마련한 연초 기획전 ‘비상’에 20여개 신발을 전시장 한쪽 벽에 줄을 지어 설치한 것을 비롯, 종종 다른 전시에서도 몇 개씩으로 설치하여 보여 왔던 연작이다. 다들 땀에 찌들고 헤진 작업화들이지만 LED가 내장된 금빛 투명수지를 통해 날개달린 신발로 바뀌어져 있다. 삶의 무게와 노동으로 고통스럽고 빈한한 사람들의 작업화들을 천사의 신발처럼 승화시킴으로써 저마다의 꿈과 소망을 향해 자유롭게 날아오를 수 있도록 하늘을 나는 헤르메스의 신발을 선물한 셈이다.

이렇듯 정신과 생각과 지식을 담아내는 무수한 단어와 문장들, 세상의 희비애락을 담은 숱한 얘기꺼리와 이미지들을 조명이 내장된 책으로 비춰 내거나, 노동의 수고와 땀내가 배인 작업신발에도 날개와 빛을 담아주기도 하고, 몸의 표정과 색깔들로 생명의 흥과 춤을 담아내는 여성 토루소들까지, 정운학의 작품에서 빛은 물리적 오브제 이상으로 매우 긴요한 표현수단으로 활용되고 있다.


2013년 광주미디어아트페스티벌에서 정운학은 모처럼 대형 옥외설치작업을 보여주었다. 페스티벌 주 무대가 된 옛 전남도청 앞의 분수대 위에 LED와 사진이미지들이 내장된 작은 아크릴상자들을 둥글게 둘러쌓아 <광주이야기>라는 이름의 거대한 미디어구조물을 만들었다. 300여개에 이르는 그 빛상자 하나하나에는 시민들이 모아 준 광주의 옛 역사와 5ㆍ18항쟁 당시의 기록사진들, 지금의 일상 삶의 풍경과 미래의 꿈들이 필름상태로 담기어 역사의 시공간을 한 무리로 연결지어 놓았다. 5ㆍ18 당시 항쟁의 심장부이면서 이후 도청 이전과 아시아문화전당 공사로 도심 속 섬이 되어버린 분수대에 도시의 역사와 현재를 담은 미디어아트로 새롭게 빛을 발산시켜 준 셈이다. 이런 LED 상자들의 조합방식은 이전에 광주문화재단 프로그램을 통해 시도했던 식당 미디어간판이나, 아파트 잿빛 옹벽에 시민들의 소망을 적은 LED 미디어아트 설치물로 야간경관과 조명효과를 부여하던 작업과도 연결되면서 그보다 훨씬 더 적극적으로 장소성과 공간감을 극대화한 것이다.


최근 몇 년 사이 정운학은 ‘입체회화’에 LED 빛을 곁들이는 미디어아트 작업에 더 적극적이다. 회화와 입체조형을 합한 작업에 디지털 빛을 내장시켜 의도하는 메시지의 전달력과 시각적 효과를 높이려는 것이다. ‘책 이야기’ ‘신문’ ‘Flying Shoes’ ‘춤’ 연작이 그런 작업들이다. 겉으로 보여지는 세계보다는 내적인 실체에 관심을 기울이는 그에게 이들 빛은 내면으로부터 드러나는 존재의 의미나 가치를 밝히는 수단인 셈이다. 이는 외부로부터 주어진 절대광선과 그로 인한 명암으로 세상 존재가 드러나고 가려지는 서구의 물리적 빛의 개념보다는 자기 내부로부터 빛을 발하여 존재의 제 모습과 살아있는 생명력을 온전히 드러내는 동양회화에서 빛의 개념과 더 일맥상통하는 개념이다.

그런 생각들을 담아 올해 봄에 정운학은 내장된 빛을 이용한 여러 형식의 미디어아트 입체회화를 다시한번 선보이는 기회를 가졌다. 광주 동명동의 제희갤러리에서 'CITY RIGHT'라는 주제로 마련된 초대전이었다. 가정집을 개조한 아담한 갤러리의 크고 작은 공간들에 맞춰 <역사책> <책이야기> <춤> <신문> <날으는 신발> <부처> 등 이전의 작업들을 재구성하였다. 더불어 일그러진 집모양의 투명조형물 안에 신문지 이미지를 넣은 <하우스> 같은 신작과 함께, 특히 조그마한 방안을 채우고 있던 <광주의 오월>은 네모난 빛상자들 안에 담겨진 광주의 근현대사의 여러 장면들이 LED 조명을 따라 드러나기도 하고 각기 다른 색으로 물들거나 어둠에 묻히기도 하면서 오월광주와 연결 짓고 있었다.

미술비평을 하는 동덕여대 심상용 교수는 “정운학이 시도하는 내조명에 의해 시선은 표면이 아니라 내면으로, 존재의 이미지가 아니라 핵심으로 향한다… 빛은 내부로부터 발해 대상을 밝히는 것을 넘어, 그 자체가 물성의 일환으로 스스로 포섭되기도 한다. 이로서 작가의 조각은 빛에 형상을 제공하고, 형상이 빛의 연장이 되게 하는, 비물질과 물질, 빛과 사물 사이를 잇는 하나의 연결고리로 작용하게 된다”고 평하였다. 전시를 기획한 신수정 관장도 “빛이 존재함으로써 파생되는 다양한 차이의 변주들, 이를테면 ‘어둠과 밝음’ ‘죽음과 생명’ ‘내부와 외부’라는 경계의 중심에서 예술을 통해 근본적이고 철학적인 물음까지도 던져보게 한다”고 하였다.

정운학은 지난 10월 11일과 12일, 광주시민문화 공원 아래 광주교와 천변, 광주극장 일대에서 펼쳐진 ‘제3회 광주미디어아트페스티벌’의 예술감독을 맡았다. 그에게는 이제까지 작가로서 개별 창작활동을 넘어 기획자로써 미디어아트와 도시문화에 대한 생각의 폭과 실제적 경험을 넓히는 귀중한 기회였을 것이다.

먼저 행사 장소부터 새롭게 개발하여 이전에 구 전남도청 앞 분수대 일원에서 진행됐던 이 페스티벌을 그는 빛고을시민문화관 앞 광주천변으로 옮겼다. 도시의 중심부를 가로지르는 광주천에 미디어아트의 빛을 띄워 예술영역과 시민문화가 어우러지는 축제로 만들고자 하였다. 광주교 위에 설치된 원형조형물에 천을 씌워 주 무대 스크린으로 활용하고, 주변 건물 외벽과 천변 고수부지에 영상작품이나 LED 미디어작품 등을 배치하여 시민들이 호기심을 갖고 문화현장을 즐길 수 있도록 친근감을 줌으로써 장소선택에서 탁월했다는 평가들이었다.

기획 면에서는 ‘미래의 빛’을 주제 삼아 국내외 60여명의 작가들을 초대하였다. 그리고 공간과 장소별 특성을 따라 미디어 파사드와 빛의 물결, 시네마 미디어아트, 어린이 미디어아트전 등으로 연출하였다. 특히 올해는 유네스코 미디어아트 창의도시 가입과 UN이 정한 ‘2015 세계 빛의 해’를 앞두고 사전 붐업이 필요한 시점에서, 또한 광주시가 전략적으로 운영하고 있는 ‘2014국제광산업전시회’의 일부로 연결함으로써 더 많은 관심과 연계효과들을 낼 수 있었다.

정운학은 이번 미디어아트페스티벌을 기획하면서 작가들과의 관계, 제도나 구조적인 부분들, 장소나 공간과 미디어아트, 빛의 이미지 효과 등 많은 것들을 새롭게 느끼고 발견했다. 특히 일반 시민들이 평소 스쳐 다니기만 하던 일상의 공간에서 뜻밖에 마주친 미디어아트에 신선한 호기심과 즐거움들을 누리는 것이 무엇보다 반가운 일이었다 한다. 물론 이런 작업 이외에 얻게 된 경험들은 개인의 창작활동에도 실질적인 도움이 될 것이다.

이제 그의 주된 관심은 미디어매체나 디지털 소재들을 활용하는데 필요한 기술적인 부분들과, 메시지를 담은 형상에 빛을 더함으로써 얻어낼 수 있는 효과들을 더 학습하고 체득하는 쪽으로 모아진다. 의미 깊은 역사나 삶의 흔적은 물론, 동시대의 풍경과 생각과 희망들을 형상과 빛을 결합한 독자적 작품세계로 함축시켜내어 일반 대중들과도 부담스럽지 않게 소통할 수 있는 일상 속 색다른 경험을 제공하려 한다.

- 조인호 (광주비엔날레 정책연구실장)